가면을 쓴 종교와 맨발의 예수: 우리가 잃어버린 복음의 힘
– 왜 기독교는 힘을 잃었는가
1. 예배의 무대, 그리고 내 안의 어색함
오늘도 나는 가면을 썼다. 예배당 문을 열기 전, 거울 속 내 얼굴에 '신실한 신앙인'이라는 표정을 조심스레 덧입혔다. 언제부터였을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이렇게 연극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기도도 했고, 찬양도 따라 불렀지만, 마음은 무언가에 눌려 있었다. 나는 분명 신앙인이고, 매주 예배하는 사람인데... 정작 '하나님 앞에 선 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예배가 은혜가 되긴커녕, 연극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손이 올라가고, 말들이 반복되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의무처럼 정해진 각본 같았고, 그 안에서 나는 '진짜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내게 털어놓았다.
목사님, 요즘엔 교회 다니는 게 회사 다니는 느낌이에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데, 영혼은 회사를 다니듯 출근하고 있는 걸까? 신앙이 의무가 되고, 관계가 업무가 되고, 예배가 실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찬양 중에 눈을 감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기도하는 척하지만 실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본다. 말씀을 듣는 척하지만 실은 설교자의 말투나 옷차림을 평가하고 있는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묻는다.
이게 정말 예배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신앙이 아니라 가면 아닐까?
당신은 어떤가요? 예배 중에 '지금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의문이 든 적이 있나요? 혹시 당신도 나처럼 신앙의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요?
2. 예수님이 가장 분노하셨던 사람들: 종교의 가면 뒤에 숨은 자들
이런 질문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들이 생각났다.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들의 삶은 거룩보다는 외식과 형식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으니..." (마 23:27)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 형식주의와 위선: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외식(겉모습)과 위선을 일삼았다. 그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길모퉁이에 서서 기도했고(마 6:5), 금식할 때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슬픈 기색을 띠었다(마 6:16). 그들에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이었다.
- 권력과 기득권 추구: 종교 권력을 정치 권력과 결탁해 유지하려 했다. 성전세, 제물 매매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도 취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사건(마 21:12-13)은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니라, 종교를 이용한 착취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 백성과의 단절: 고통받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들만이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비난했고(마 9:11),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금지했다(눅 13:14). 그들에게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성전 안에서 제사를 집전하고, 율법을 정리하고, 제물과 돈을 관리하던 그들의 삶은 철저히 '신앙 시스템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이었고, 그 역할에 익숙해질수록 진짜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세리, 창녀, 병자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셨지만,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가장 강한 분노를 표현하셨다는 것이다. 왜일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이나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시며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비판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위선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고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단순한 실수나 부족함이 아니라, 근본적인 정체성의 왜곡임을 지적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있었다.
3. 익숙함에 속고 있는 우리 – 제사장과 닮아가는 교회
교회가 더 이상 다르게 느껴지지 않아요.
한 청년이 소그룹 모임에서 조심스레 내뱉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 고요함이 단지 충격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미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느꼈다.
예배는 여전히 흐르고, 말씀은 여전히 선포되지만, 그 안에서 점점 '다름'은 사라지고 있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경쟁적이었고, 사람은 수치로 나뉘었고, 예수님의 이야기는 자기계발적 문장처럼 소비되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교회가 제도화되고, 안정화되면서 점차 그 본질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점점 더 세속 권력과 결합하며 변질되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 기관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희석되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타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지만, 개신교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화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역사적 과정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목회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현상은 분명 교회의 신뢰를 잃게 하는 부분이다:
- 권위 중심 구조: 교회를 "내 교회"로 만들고, 목회자를 '영적 귀족'처럼 여기는 문화. 이는 예수님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0:26)고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안락함과 명예 추구: 사택, 사례비, 사역 차량 등의 특권이 오히려 예수님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는 말씀과 대비될 때, 거부감이 생긴다. 예수님은 특권을 포기하셨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특권을 당연시한다.
- 복음의 약화: '섬김과 자기부인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자기계발적 메시지와 성공적 리더십이 주를 이루는 설교. 십자가는 장식품이 되고, 부활은 교리가 되었지만, 그 실존적 의미는 희석되었다.
여러 기독교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교회 내 법적 분쟁이 급증하고 있으며, 그 중 상당수가 재정과 권력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교회 건물은 더 화려해졌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세속적 조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세상을 이기라'고 말하는 교회가 정작 세상처럼 돈 문제, 자리 문제, 명예 때문에 흔들린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 교회의 모습인가요?" "예수님이 원하신 공동체가 맞을까요?"
세속을 이기려다 세속을 닮아버린 우리의 모습. 그게 오늘날 기독교의 민낯이 되었다.
처음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싶었다. 더 정직하게, 더 진실하게, 더 거룩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세속을 경계했고, 기도했고,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서 세속은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교회도 '성공'이 기준이 되었고, 목회자도 '팔리는 콘텐츠'를 고민했고, 성도도 '유명한 교회'를 찾아다녔다.
'영광'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속마음은 '영향력'과 '인정'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결국 세속을 이기려던 열망은, 세속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변해버렸다.
4. 왜 기독교는 힘을 잃었는가?
복음은 본래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며, 가난하고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는 힘이 있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이 돌 때 목숨을 걸고 병자들을 돌보았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이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사람들까지 돌본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삶이 메시지였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을 실천했고, 그 실천이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요.
하나님은 믿고 싶은데, 기독교는 못 믿겠어요.
그건 단순한 오해나 편견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진짜 예수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복음은 원래, 힘센 사람이 아닌 약한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예수님은 '승리'보다 '순종'을, '최고'보다 '섬김'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말한다. "교회도 경쟁력 있어야죠." "목회자도 리더십 트레이닝 받아야죠." "그런 마인드로는 성장 못 해요."
그 순간, 복음은 '경쟁의 언어'로 포장된 무력한 슬로건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도 결국 세상이랑 똑같잖아." 그리고 돌아선다.
이런 모습들이 청년들과 '가나안 성도(교회를 떠난 신자들)'에게는 깊은 신뢰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 "말은 사랑인데, 삶은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
- "예수님은 낮은 곳에 계신데, 목회자는 높은 곳에서만 본다."
- "성경은 희생을 말하는데, 교회는 성공을 말한다."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2004년에는 한국인의 21%가 개신교인이었지만, 2021년에는 17%로 감소했다. 특히 20-30대 젊은 층에서 이탈이 두드러진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복음의 영향력 상실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시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로마 제국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로마가 힘과 명예를 숭배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약함과 섬김을 선택했다. 로마가 부와 쾌락을 추구할 때, 그들은 나눔과 절제를 실천했다. 그 '다름'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제국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세상이 성공을 외칠 때 우리도 성공을 외치고, 세상이 효율을 말할 때 우리도 효율을 말한다. 세상이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를 추구할 때, 우리도 같은 가치를 다른 언어로 포장할 뿐이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의 실제 죽음이 아니라, 기독교가 자신의 가치를 배반하여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구원받은 자들처럼 보이려면, 더 구원받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도전했다.
우리는 이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히 방어적인 태도로 "우리는 다르다"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변화를 시작할 것인가?
5. 가면을 벗은 사랑, 맨발로 걸으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사장이 아니셨다. 그분은 성전의 주인이었지만 성전 안보다 광야와 거리, 고통의 현장에 더 오래 계셨다.
그분은 제도적 권위가 아닌 삶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세리와 창녀, 병자와 이방인... 제도 밖의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셨고, 맨발로 흙길을 걸으셨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권위를 드러내셨다.
-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셨고,
- 돌 맞을 위기에 놓인 여인 앞에 먼저 몸을 숙이셨고,
- 병자들에게 손을 대셨고,
- 자기를 팔아넘긴 제자에게도 끝까지 '친구'라 부르셨다.
- 채찍과 침뱉음을 참으셨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완전한 재정의였다. 당시 문화에서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일이었다.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 씻지 못하시리이다"(요 13:8)라고 거부한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권위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예수님은 권위가 섬김에서 나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권위 개념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었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권위 개념과도 충돌한다.
예수님은 이기려 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하려 하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제사장이 아닌 선한 목자로 오셨고, 자신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로 설명하셨다(요 10장). 진짜 목회자는:
- 섬기는 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고,
- 가장 작은 자와 함께하며,
-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여야 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자기 비움(kenosis)의 표현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 2:6-7)고 설명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었다.
교회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실까? 화려한 강단 위일까, 아니면 교회 밖 소외된 이들 곁일까? 그분은 대형 교회의 VIP 좌석에 앉아 계실까, 아니면 노숙자 쉼터에서 봉사하고 계실까? 그분은 성공 신학을 설교하실까, 아니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말씀하실까?
이 질문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6. 복음을 다시 힘 있게 하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숫자나 행사, 시스템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복음의 회복은 가면을 벗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 '신앙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부담 대신,
→ "지금 나는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 용기.
- 멋진 설교보다,
→ 실패를 고백할 수 있는 정직한 삶.
- 교회 규모보다,
→ 한 사람의 눈물을 같이 울 수 있는 사랑.
이게 맨발의 신앙이다. 그리고 이게 기독교가 다시 힘을 회복하는 길이다.
복음의 힘은 많은 예산이나 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정직함에서 나온다. "우리도 흔들린다." "우리도 세속의 유혹에 빠졌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려 한다." 이 고백이 회복의 시작이다. 교회가 먼저 무릎 꿇고, 목회자가 먼저 가면을 벗고, 성도들이 서로의 약함을 껴안을 때, 그 진실이 세상을 흔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는 사고 난 후 야전 병원 같은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교회는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곳이 아니라, 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면을 쓰고 완벽한 척할 때, 복음의 능력은 약해진다. 오히려 우리의 상처와 실패를 인정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우리가 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강해진다.
실제로 이런 변화를 시작한 공동체들이 있다. 목회자가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하고, 성도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교회 재정을 지역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곳들. 그곳에서는 젊은이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왜일까? 그들은 가면이 아닌 진짜 예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교회는 화려한 예배당 건축 계획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지역의 노숙자 쉼터를 지었다. 또 다른 교회는 주일 예배 시간에 목사가 설교 대신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떤 교회는 교인 수를 세는 대신 얼마나 많은 이웃을 도왔는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모여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움직임이 되고 있다.
세속을 이기려다 세속을 닮아버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다시 예수님의 길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을 다시 힘 있게 하는 길이다.
7. 우리, 함께 맨발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살아갈 때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신앙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가면을 벗고 싶다.
기도 중에 눈물이 흐르면 그대로 울고 싶다.
의심이 들면 꾸밈없이 하나님께 고백하고 싶다.
약함이 드러나도 그걸 숨기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영적 진정성을 향한 갈망이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가면을 벗는 것은 단순히 솔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세속은 늘 우리에게 말한다. "더 올라가야 한다, 더 가져야 한다, 더 유명해져야 한다." 그 목소리 앞에서 기독교는 너무 오래 흔들렸다. 그러다 결국 그들과 비슷한 말, 비슷한 방식, 비슷한 욕망을 따라가 버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 적게 가져도,
- 느리게 가도,
- 무명이어도,
-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복된 길이라는 것.
세상이 "더 많이!"라고 외칠 때, 우리는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세상이 "더 빨리!"라고 재촉할 때, 우리는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 세상이 "더 높이!"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낮은 곳에 머물러도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저항하고,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2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앞에 던져질 때도 두려움보다는 평안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저항하며 다른 길을 선택했다. 중세의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인종 차별에 맞섰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마더 테레사는 가장 가난하고 병든 이들 곁에서 평생을 보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맨발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힘이 드러났다.
오늘, 당신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함께 가면을 벗는 여정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내일 예배당에 들어설 때,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서보자. 그리고 주변의 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짜 고민과 약함을 나눠보자. 그것이 예수님이 걸으셨던 맨발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초대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완벽함이 아니라 진실함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맨발로 오셨듯, 우리도 더 이상 가면을 쓰지 말고, 맨발로 그분의 길을 따라가자. 진짜 복음의 힘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8. 맨발의 신앙, 그 실천적 의미
맨발의 신앙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까?
첫째, 진정성 있는 예배의 회복이다. 예배는 공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실한 만남이어야 한다. 찬양팀의 기술적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함이다. 설교자의 화려한 언변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예배당의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진실한 마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는 않은가?
둘째, 공동체 안에서의 진실한 관계이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한다. 야고보서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고 권면한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한 교회에서는 '진실한 나눔의 시간'을 마련했다. 소그룹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와 약함, 의심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가면 뒤에 숨어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진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셋째, 세상을 향한 진정한 섬김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의 성공은 주일 출석 인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로 측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맨발의 신앙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9. 가면 벗기의 어려움과 그 극복
가면을 벗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가면을 통해 자신을 보호해왔고, 그것이 없으면 불안하다. 또한 교회 문화 자체가 종종 이러한 가면을 요구하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항상 기쁘고 감사해야 해요.
신앙인은 의심하면 안 돼요.
목회자는 항상 강해야 해요.
이러한 메시지들이 우리에게 가면을 쓰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의문까지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는 외침은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인용하셨다. 욥은 자신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고,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렘 20:7)라며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갈등을 표현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면을 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친다.
가면을 벗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내 진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내 약함이 드러나면 신앙이 부족하다고 판단받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할 때, 그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
가면을 벗는 첫 걸음은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점차 그 원을 넓혀가는 것. 이것이 맨발의 신앙으로 가는 여정이다.
한 청년 목회자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나눴다. "처음에는 완벽한 목회자로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저를 고립시켰고, 결국 번아웃으로 이어졌습니다. 용기를 내어 몇몇 성도들에게 제 우울증과 의심에 대해 나눴을 때, 놀랍게도 그들은 저를 거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께 치유의 여정을 걷게 되었습니다."
10. 맨발의 신앙이 가져올 변화
맨발의 신앙, 가면을 벗은 신앙이 교회와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첫째, 교회 내부의 치유와 회복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고 떠난다. 그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오히려 정죄받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된다면, 이러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한 청년은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오랫동안 제 의심과 고민을 숨겨왔어요. 그런데 한 목회자님이 자신도 때로는 의심한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을 때, 처음으로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저는 다시 교회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세상을 향한 진정성 있는 증거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성에 감동한다. 그들은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임을 보고 싶어한다. 그들은 우리가 모든 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탐구하는 사람들임을 알고 싶어한다.
한 불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항상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말할 때 거리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가 자신의 어려움과 고민을 솔직하게 나눌 때, 처음으로 그의 신앙이 진짜라고 느꼈습니다."
셋째, 복음의 본질 회복이다. 복음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자신의 약함과 필요를 인정할 때,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넷째, 다음 세대를 위한 희망이다. 젊은 세대는 종종 교회의 위선과 형식주의에 실망한다. 그들은 진정성을 갈망한다. 우리가 맨발의 신앙을 살아낼 때, 그들은 복음이 여전히 관련성 있고 변화를 가져오는 힘임을 볼 수 있다.
한 청소년 사역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우리가 사는 방식을 더 많이 봅니다. 우리가 진정성 있게 살아갈 때,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응합니다."
11. 맨발의 여정 -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기
맨발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룻밤에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평생에 걸친 여정이다. 우리는 때로 실패하고, 다시 가면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진정성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노력한다면, 그 여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는 복음의 원수"라고 말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 없는 세례, 십자가 없는 부활을 의미한다. 맨발의 신앙은 값비싼 은혜를 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편안함과 안전함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우울하거나 무거운 길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고 말씀하셨다.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을 더 풍성히"(요 10:10) 얻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으로,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이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
맨발로 걷는 것은 때로 아플 수 있다. 우리는 돌부리에 발을 찧고, 가시에 찔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삶이고, 진짜 신앙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편안할 때가 아니라, 가장 진실할 때 우리를 만나신다"고 말했다. 우리가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신다.
이 여정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우리는 혼자서 이 길을 걸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라고 권면한다.
맨발의 신앙은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말씀하셨다. 이 사랑이 우리의 가면을 벗기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
오늘, 당신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함께 가면을 벗는 여정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내일 예배당에 들어설 때,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서보자. 그리고 주변의 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짜 고민과 약함을 나눠보자. 그것이 예수님이 걸으셨던 맨발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결심한다.
기도하다 울어도 괜찮다고 믿기로.
의심이 들 때 그것마저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함이 드러날 때 그것이 은혜의 통로임을 인정하기로.
다시 기도 앞에 설 때,
나는 흘리는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의심이 찾아올 때,
나는 그 물음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다시 약함이 드러날 때,
나는 그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이것이 맨발의 신앙이 추구하는 진정성이다. 그리고 이 진정성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맨발로 오셨듯, 우리도 더 이상 가면을 쓰지 말고, 맨발로 그분의 길을 따라가자. 진짜 복음의 힘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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