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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 에세이/왜 기독교는 힘을 잃었는가?

- 그 두 번째 이유 중 첫 번째: 세속을 이기려다 세속을 닮은 우리

왜 기독교는 힘을 잃었는가? - 그 두 번째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면을 쓴 종교와 맨발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제 그 복음이 어떻게 우리 교회 안에서 사라져버렸는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1. 성공의 언어로 포장된 복음

 

"우리 교회가 올해 목표한 성장률은 15%입니다."
"이번 프로그램의 ROI(투자수익률)를 분석해 보니 상당히 효율적입니다."
"우리는 더 강력한 브랜딩 전략이 필요합니다."

 

어느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들은 대화들이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대화인가, 아니면 기업 임원들의 회의인가? 그 자리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요즘 교회 안에서 유행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담임목사라고 쓰고 사장님이라고 읽는다." 웃고 넘기기엔 씁쓸한 현실이다. 교회 직원들이 목사님을 '대표님'이라 부르고, 부교역자들이 '팀장'이 되고, 성도들은 '고객'이 되어가는 현실. 웃음 뒤에 숨은 아픈 진실이다.

 

한 교회의 신년 공동의회에서 목격한 장면도 떠오른다. 재정 담당 순장이 교육부서 예산 사용에 대해 보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고등부와 청년부의 실적이 예산 집행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다음 분기에는 성과 지표를 개선하지 않으면 예산 재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영혼을 양육하는 교회인가, 아니면 분기별 실적을 평가하는 기업인가?'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묵상하던 중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복음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성공, 효율, 성장, 영향력...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어휘가 아니라 세속의 어휘였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고 말씀하셨지, "나는 CEO요 너희는 직원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고 하셨지, "내가 성공한 것같이 너희도 성공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언제부터 우리는 복음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세속의 언어를 빌려 쓰기 시작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복음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럴듯한 종교적 용어들은 익혔지만, 그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 채 세속의 프레임으로 복음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은혜"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성과"를 생각하고, "섬김"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경력"을 쌓고, "예배"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복음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통해,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을 통해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2. 세속화의 미묘한 침투 - 현대 교회의 '절대반지'

 

세속화는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때로는 선한 의도를 가장하여 교회 안으로 스며든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교회성장운동(미국에서 도널드 맥가브란과 피터 와그너 등이 주도한, 교회 성장을 위한 사회학적·경영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운동)은 선교적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영 원리와 마케팅 전략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방법론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그 방법론이 교회의 본질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성이 희생되었다.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기도와 인내가 뒤로 밀렸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깊이 있는 제자도가 간과되었다.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곳에 가야 한다." 이런 고지론(高地論)이 교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복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순수한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향력'이라는 단어는 마치 톨킨의 소설 속 '절대반지'처럼 우리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선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그 힘에 매료되어 결국 그 힘에 종속되는 모습. 오늘날 교회의 '절대반지'는 바로 이 '영향력'이 아닐까?

 

한 중견 목회자의 고백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단순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숫자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 숫자를 위해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프로도가 반지를 지키려다 결국 그 힘에 굴복하는 것처럼,
저도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유혹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직면한 시대적 유혹이다. 세속적 성공의 기준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기보다 기독교적으로 포장하는 길을 택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는 말로 성장에 대한 집착을 정당화했다.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라는 명목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희생했다.
"현대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라는 이유로 복음의 도전적 메시지를 희석시켰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요 17:14-16)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세상을 닮아가는 모순에 빠져버렸다.


 

3. 성공 신화에 갇힌 교회의 비극 - 구독자 수로 측정되는 복음

 

한 교회에서 들은 말입니다. "이번 주 설교는 구독자 반응이 별로더라. 다음엔 좀 더 부드러운 시리즈로 가야겠어." 순간, 마치 유튜브 채널 전략 회의 같았습니다. 또 다른 교회 회의에서는 "우리 교회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고 있어요.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리브랜딩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이 오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었던 그 자리에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접근 자체가 문제일까, 아니면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는 것이 문제일까?"

 

"우리 교회는 지난 5년간 300% 성장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는 매주 10만 명이 온라인으로 시청합니다."

 

이런 말들이 교회의 성공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이 우리의 유일한 또는 최우선 기준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노방전도'라는 단어가 교회 어휘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복음 전파의 방식이 급격히 변화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낯선 이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콘텐츠'로서 복음을 전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하철 입구에서는 여전히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전도지를 들고 서 있는 교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학교 앞에서 학생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던 모습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온라인 PR 사역에서 뒤처지면 오프라인 교회 성장에도 영향이 크다"는 말이 목회자 모임에서 공공연히 오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변화 자체는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다. 사실 교회는 오랫동안 '은혜로'라는 말로 전략적 사고와 객관적 평가를 회피해왔다. 시대에 맞게 복음 전파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바울도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 9:22)고 말했다.

 

문제는 방법의 변화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이다. '구독자 수', '조회수', '인지도', '브랜드 평판'이 복음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유일한 또는 주요 지표가 될 때, 우리는 위험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런 지표들을 높이기 위해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유명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십자가와 죄에 대한 메시지를 듣기 싫어해요.
그래서 우리는 더 긍정적이고 실용적인 메시지로 접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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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방법은 변할 수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변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고, 그 중 하나는 그분을 배신했다. 수천 명이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대부분이 떠나갔다. 인간적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였다. 하지만 그 '실패'가 세상을 구원했다.

 

초대교회는 카타콤(로마 제국 시대의 지하 묘지이자 박해를 피해 모이던 비밀 예배 장소)과 가정에서 모였고,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숫자나 건물, 프로그램으로 성공을 측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공 기준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였다.

 

로마 역사가 터툴리안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보라, 저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증거였다. 화려한 건물이나 대규모 집회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방법을 바꾸는 지혜이다. 디지털 도구와 현대적 접근법을 사용하되, 그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성공 기준은 여전히 "얼마나 사랑하는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는가", "얼마나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가"여야 한다.

 

한 젊은 목회자가 털어놓은 고백이 가슴에 와닿는다. 

 

처음에는 온라인 사역을 시작하면서 조회수와 구독자 수에 집착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가까워지는가라는 것을요.
이제 저는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만드는 콘텐츠가 사람들을 당신께로 인도하게 하소서. 비록 그 숫자가 적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균형이다. 새로운 방법은 받아들이되, 오래된 진리는 지키는 것. 시대에 맞게 변화하되, 복음의 본질은 타협하지 않는 것. 효과적인 전략을 사용하되, 우리의 궁극적인 성공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것.

 

이런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성공의 기준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교회와 신앙에도 적용한다.

 

한 교회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들은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이 말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숫자적 성장만이 성장인가? 영적 성숙, 사랑의 깊이, 섬김의 확장은 성장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다(마 13:31-32).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그러나 그 성장은 서서히,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일어난다. 우리는 즉각적인 결과와 눈에 보이는 성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종종 느리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는 '성공'의 정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세상은 성공을 외적인 성취, 인정, 영향력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성공은 신실함, 순종, 사랑으로 정의된다. 예수님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고 말씀하셨지, "잘 하였도다 성공적이고 유명한 종아"라고 하지 않으셨다.

 

디지털 시대의 교회는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은 복음을 더 넓게 전파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목회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매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메시지가 유튜브에서 얼마나 인기를 끌까?'를 고민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메시지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도전적인 주제를 피하고, 논쟁적인 구절을 건너뛰고, 듣기 편한 메시지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스타일을 세련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세련되게' 만들려는 무의식적 시도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회중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게 하기보다, 그저 듣기 좋고 소비하기 쉬운 메시지로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의 접근법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변증할 때 당시 로마의 철학, 관습, 정치 사상 등을 활용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그는 아테네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며 복음을 설명했습니다(행 17:28). 그러나 바울은 이런 문화적 접점을 활용하면서도 복음의 본질—십자가와 부활—을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법은 유연하게 바꾸었지만, 메시지는 단호하게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거칠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도전적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전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현대 문화와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유혹이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 많이 공유하는 콘텐츠, 오래 시청하는 콘텐츠를 선호한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듣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불편하고, 도전적이고, 우리의 안락함을 방해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고 말하게 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변화시킬 수 없다. 십자가와 부활, 죄와 구원, 은혜와 진리—이것들은 시대에 따라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 신화에 갇힌 교회는 결국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은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의 약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공 신화에 갇히는 이유는 바로 믿음의 야성, 십자가의 약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성공을 추구하다가, 복음이 가진 거친 야성,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역설적 능력을 상실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는 실패와 약함의 상징이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곳이다. 우리가 이 역설을 잊을 때,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신실함이다. 그것은 숫자, 인지도, 영향력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 희생, 섬김으로 측정된다.

 

디지털 시대의 교회가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면, 구독자 수가 아니라 제자도에, 조회수가 아니라 변화된 삶에, 인지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세속의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복음의 참된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4. 소비주의에 포획된 신앙의 위기

 

"이번 주에는 어느 교회에 가볼까?"
"저 목사님의 설교가 더 은혜롭던데."
"우리 교회 찬양은 별로인 것 같아."

 

이런 대화들이 낯설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더 좋은 설교, 더 감동적인 찬양, 더 편리한 시설, 더 다양한 프로그램... 이런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선택한다.

 

교회도 이런 소비자 심리에 맞춰 "영적 상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예배는 "경험"이 되고, 설교는 "콘텐츠"가 되고, 교인은 "고객"이 된다. 교회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주의 문화가 신앙의 영역까지 침투한 결과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로, 현대 사회의 유동성과 소비주의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함)은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고 표현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소비되고, 버려지는 사회다. 불행히도 신앙도 이런 소비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 청년의 고백이 이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저는 5년 동안 네 개의 교회를 다녔어요.
처음에는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다음에는 찬양이 별로여서, 그다음에는 공동체가 폐쇄적이어서...
계속 더 좋은 교회를 찾아 옮겼죠. 그런데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영적 쇼핑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소비주의의 정반대다. 소비주의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다. 소비주의는 즉각적인 만족을 약속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도전적인 메시지를 "당신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5가지 방법"과 같은 소비자 친화적 메시지로 바꾸었다. 우리는 복음을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포장했고, 그 과정에서 복음의 변혁적 능력을 잃어버렸다.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듯, 신앙과 교회도 선택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헌신의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만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목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뷔페식'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교리는 취하고, 불편한 가르침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분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소비주의 문화는 또한 깊이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어렵게 만든다. 소비자는 항상 더 나은 옵션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한 곳에 뿌리내리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앙은 깊은 뿌리와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한 오래된 교회의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를 쉽게 옮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시간과 인내,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참고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소비주의에 포획된 신앙은 결국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소비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됨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우리는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롬 12:4)라고 말했다. 교회는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유기적 공동체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역할과 책임을 가진 지체다.

소비주의는 이러한 유기적 연결을 무시하고, '교회 따로, 자아 따로'의 분리된 신앙생활을 조장한다. 교회는 내가 필요할 때 방문하는 서비스 센터가 되고, 나는 그저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된다. 이런 관계에서는 진정한 헌신, 책임, 상호 의존이 자라날 수 없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교회의 위기는 단순히 출석률 감소가 아니라, '소속감'의 상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서비스를 소비하지만,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비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신앙의 본질—하나님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연결, 세상을 향한 섬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더 많은 영적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소비주의의 덫을 벗어나는 핵심은 우리의 역할 전환에 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소비하는 '소비자'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 3:9)라고 말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선언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감당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영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5. 권력과 명예의 유혹 - 십자가 없는 영향력의 함정

 

"저 목사님은 대통령과 친분이 있대요."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입니다."
"올해 우리 교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권력과 명예의 유혹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항상 존재해왔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했다"(마 23:6).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이것이 예수님의 리더십 철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다. 정치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교계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 특히 교단 내 권력 구조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담임 목사들이 노회장, 총회장 같은 교단 내 높은 직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지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중견 목회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총회장 선거 시즌이 되면 교회가 완전히 선거 캠프로 변합니다. 목사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표를 모으고, 교회는 재정적 지원을 요청받고, 성도들은 봉사자로 동원됩니다. 이 모든 것이 '교단을 위한 봉사'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지만, 실상은 개인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내 권력 구조의 세속화를 보여준다. 교회 지도자 직책이 섬김의 자리가 아니라, 권력과 명예의 자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를 위해 교회의 자원—재정, 인력, 시간—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본래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자원이 개인의 명예와 권력 추구에 소비되는 것이다.

 

한 은퇴 목사의 고백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40년 목회를 마치고 돌아보니, 제가 얼마나 인정받기를 원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청중, 더 높은 지위...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정작 예수님의 마음은 놓쳐버렸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정말 원했던 것은 명예였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명예'를 동일시하는 오류다.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성공과 인정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더 유명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더 커지면, 하나님의 영향력도 커질 것이다"라는 논리다.

 

성경은 이런 논리와 정반대되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는 특히 강력한 반례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의 군대를 3만 2천 명에서 300명으로 줄이셨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숫자와 힘을 줄이심으로써, 승리가 인간의 능력이나 규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됨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더 크고 강해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논리와는 정반대의 원리다.

 

이것은 고지론(高地論)의 또 다른 형태로, 자신의 성공 욕구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자기기만적 논리는 복음의 본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성공이나 인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섬김과 희생,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을 통해 드러난다.

 

이 문제는 단지 개인 목회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 공동체 역시 양적 성장을 영적 건강성의 지표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져있다.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 "수십 개의 위성 교회를 가진 교회", "예산 규모가 수백억인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공한 교회', '축복받은 교회'로 인식된다.

 

이런 인식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교회의 건강성은 규모나 숫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양성되고 있는지, 공동체 안에 사랑과 섬김의 문화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지역 사회와 세상을 향한 섬김과 정의의 실천이 얼마나 활발한지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마 13:31-33), 하나님 나라는 외적으로 화려하고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내적으로 강력한 변화의 능력을 가진 것임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이 가르침을 잊고, 세속적 성공의 기준—크기, 숫자, 영향력, 인지도—을 추구하고 있다.

 

권력과 명예의 유혹은 교회를 세속 사회의 또 다른 권력 기관으로 변질시킨다.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추구할 때, 복음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약해진다. 교회가 사회의 기득권과 결탁할 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은 희석된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합할 때마다 영적 활력을 잃어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는 점차 제국의 도구가 되어갔다. 중세 시대에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누릴 때, 복음의 급진적 메시지는 체제 유지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위험은 여전하다.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복음의 가치를 타협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위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낮추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사역하셨다. 그분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갈릴리의 어부들과 함께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가 세속적 권력과 명예를 추구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진리다.


 

6. 십자가 없는 번영신학, 물질주의의 덫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더라."
"신앙생활을 잘하면 잘된대."
"헌금하면 백 배로 돌려받는대."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들 속 '복'은 과연 복음이 말하는 복일까?

 

이 말들은 복음을 보상의 거래로 축소시키며,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에 선 주장들이다.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이 관계를 "내가 이만큼 믿으면, 하나님은 이만큼 축복해주신다"는 계약적 거래로 변질시킨다.

 

번영 신학(prosperity gospel)은 현대 교회에 깊이 침투한 세속적 가치관이다. 이 가르침은 신앙과 물질적 성공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며, 하나님을 물질적 축복의 공급자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였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말씀하셨고,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경고하셨다.

 

초대교회는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행 2:44-45) 주었다. 그들에게 물질은 섬김의 도구였지, 성공의 척도가 아니었다.

 

물질은 도구이다. 도구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물질은 우리의 유익을 돕는 수단에서 하나님을 대신해 우리를 다스리는 우상이 되어버린다. 예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질이 도구에서 주인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재물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맘몬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물질적 번영을 신앙의 증거로 가르친다. 목회자들은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정당화하고,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시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물질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증거라는 가르침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을 합리화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한편, 예수님의 삶을 극빈자의 모습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균형 잡힌 관점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고, 필요에 따라 물질적 풍요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물질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보셨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시는 삶을 사셨다.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이다.

 

헌금, 물질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는 길

 

"이 헌금은 당신의 삶에 백 배의 축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자주 들려오는 헌금의 메시지들은 때때로 헌금을 '복을 얻기 위한 계약금'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성경은 헌금을 거래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의 표현으로 말한다.

 

헌금은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신 분이시다. 헌금은 그 사랑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며, 나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고백의 행동이다.

 

예수님은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가난한 과부는 그들 모두보다 많이 넣었도다…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 12:43–44). 하나님은 많이 드림보다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역설적이게도, 올바른 헌금 생활은 물질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는 강력한 영적 훈련이 된다. 헌금은 맘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삶의 주권을 돌리는 실천적 행위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하지만, 헌금은 "덜 가져도 괜찮다.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신뢰의 선언이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물질주의의 지배력을 깨는 영적 저항 행위다. 우리가 드릴수록, 물질은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각하게 되고, 그 선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헌금, 공동체를 움직이는 사랑의 에너지

 

헌금은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현대 교회에서 헌금은 단순히 건물과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이며, 공동체의 사명을 실현하는 도구다.

 

헌금은 교회 공동체가 가난한 자를 섬기고, 청년을 지원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역사회를 품고 살아가도록 돕는 복음의 동력이다. 초대교회는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고"(행 2:45), 그 헌신을 통해 공동체가 살아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권면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간의 연대와 사랑의 표현임을 강조했다(고후 8-9장). 그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말했다.

 

헌금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교회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적 신앙을 넘어, 공동체적 신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실천이다.

 

건강한 헌금생활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는 실제적 통로다. 물질주의는 "더 많아야 안전하다", "더 쌓아야 성공이다"라고 속삭이지만, 헌금은 "나는 이미 충분하다", "하나님이 나의 공급자다"라고 선언한다. 헌금은 물질의 흐름을 바꾸는 훈련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이웃을 위해 흘려보내는 순종이다.

 

그래서 건강한 헌금생활은 믿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물질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헌금은 단순히 교회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물질주의의 덫에서 해방시키는 영적 훈련이다.

 

월터 브루그만, 유진 피터슨, 존 파이퍼, 팀 켈러 등 많은 현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한목소리로 경고한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우상은 맘몬(재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숭배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결정과 우선순위는 종종 물질적 가치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더 신뢰한다.

 

물질주의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약화시킨다. 교회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교회가 중산층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수용할 때,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약해진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는 것을 자신의 사역의 증거로 제시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이 우선순위를 회복해야 한다.


 

7. 진정성을 잃은 교회

 

이미지 관리의 함정

 

"우리 교회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는 항상 하나됨을 유지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 관리는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기업들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정치인들은 대중적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PR 전문가를 고용한다. 불행히도, 이런 이미지 관리 문화는 교회에도 침투했다.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문제와 갈등을 숨기고, 완벽한 공동체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감추고, 항상 강하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런 이미지 관리는 진정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위선을 강하게 비판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부르셨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자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경고했다.

 

한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의 고백이 교회에 주는 교훈이 크다. "AA(Alcoholics Anonymous, 알코올 중독자 익명회라는 국제적 자조 단체)에서는 첫 모임부터 '나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한 번도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괜찮은 척, 완벽한 척하고 있었거든요."

 

교회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이미지 관리에 치중하게 될 때 결국 위선의 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공동체가 기대하는 역할만을 연기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진정한 회개와 성장, 치유가 일어나기 어렵다.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그 대표적인 예로,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내 속에 거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오직 죄뿐이라"(롬 7:18)고 고백했고, 자신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역설적 진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한 회복과 치유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개인들이 자신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이나 자기 과시로 변질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성경 말씀의 바른 이해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공동체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있을 때, 우리는 위선으로 흐르는 위험을 피하고 진실된 회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에서 진정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한다. 사람들의 위선적인 위로나 피상적인 공감에 의존할 경우, 기독교가 추구하는 전인적인 회복과 치유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더 깊은 위선의 고통 가운데 빠질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을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위로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교회 공동체는 이 하나님의 위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미지 관리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먼저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성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진정한 교회는 실패를 숨기는 곳이 아니라, 실패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고 함께 회복을 찾아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병원과 같아야 한다. 병원에서는 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영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병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존재이며, 하나님께 정직한 실패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회복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정직한 고백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시편 기자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정직한 고백이 치유와 회복의 첫걸음이다.

 

한 목회자는 자신의 우울증 투병 경험을 공개적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그의 솔직한 고백이 오히려 많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제가 약함을 인정했을 때, 사람들도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함 속에서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깊이 없는 영성의 위기

 

"5분만 기도해도 충분해요."
"이 책 한 권이면 영적 성장의 비결을 알 수 있어요."
"이 세미나에 참석하면 당신의 신앙이 도약할 거예요."

 

현대 사회는 빠른 결과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패스트푸드, 속보, 인스턴트 메시지... 모든 것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런 문화는 교회의 영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은 현대 사회가 질적 향상보다 양적 팽창을 추구하는 물량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신앙의 깊이보다는 교인 수, 건물 크기, 프로그램 다양성과 같은 외적 성장 지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속성 신앙과 말초적인 영적 현상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있는 영적 훈련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있는 영적 훈련 대신 즉각적인 영적 경험을 추구한다. 묵상과 침묵, 금식과 같은 전통적인 영적 훈련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외면받는다. 대신, 감정적 고양을 주는 예배 경험이나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설교가 인기를 끈다.

 

이런 메시지들은 신앙의 깊이보다 효율성과 편리함을 강조한다. 마치 영적 성장에도 '지름길'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쉬운 길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고 말씀하셨고, 제자도의 길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성장을 경주에 비유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이라고 말했다.

 

한 영성 지도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얕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영적 뿌리 없이 화려한 가지와 잎만 키우려 한다.
그러나 폭풍이 오면, 그런 나무는 쉽게 쓰러진다.

 

깊이 있는 영성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인간 관계가 하루아침에 깊어지지 않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시간과 정성, 그리고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발전한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는 서로의 이야기와 삶의 모습이 시간에 의해 숙성되고 검증될 때 형성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관계적 측면을 간과하고, 빠른 영적 경험이나 즉각적인 응답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관계의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작은 어려움이나 불편함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진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비 체험을 넘어서, 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점점 깊어지는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계를 위한 노력과 집중 없이 영성을 논하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깊이 없는 영성은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많은 교회들이 경험한 것처럼, 외적 환경이 변할 때 신앙의 기초가 시험받는다. 예수님은 이것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의 차이로 설명하셨다(마 7:24-27).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폭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데, 이는 그 집이 견고한 기초, 즉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런 현상을 '값싼 은혜'라고 불렀다. 그는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 없는 세례, 고백 없는 성찬, 개인적 고백 없는 사죄"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우리는 값싼 은혜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위로는 원하지만, 복음의 도전은 피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받고 싶지만, 그 사랑이 요구하는 변화와 헌신, 그리고 지속적인 관계 형성의 노력은 거부한다.

 

이런 얕은 영성은 교회를 세속 문화의 또 다른 버전으로 만든다. 교회가 깊이 있는 영적 훈련과 진정한 제자도를 포기할 때, 그것은 단지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자기계발 센터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신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지름길이 없다. 그것은 매일의 기도와 말씀 묵상,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과 책임, 고난 속에서의 인내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가 이런 깊이 있는 영성을 회복할 때, 세속 문화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유진 피터슨은 "제자도는 전자레인지 요리가 아니라 서서히 익는 스튜와 같다"고 말했다. 이 통찰은 제자도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 진정한 제자도는 단순히 제자훈련 코스를 마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평생의, 전인격적 여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 훈련은 단순한 성경공부나 지식 축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군인, 경찰, 소방관들이 위기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훈련하듯, 영성 훈련은 삶의 도전과 유혹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반응이 나오도록 우리의 영적 근육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우리의 마음과 영혼, 행동 양식까지 변화시키는 총체적 훈련인 것이다.

 

깊이 있는 영성은 따라서 일생에 걸친 여정이며, 단기간의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순종과 훈련을 통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형성되어 가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깊이 있는 영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어떤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