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돌 위에 세워진 삶

본문: 누가복음 20:9-19
중심 구절: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눅 20:17)


1️⃣ 권위가 무너진 시대, 우리는 무엇 위에 서 있나

"아니, 누가 나한테 그럴 자격 있어요?"

 

우리는 이 문장을 더는 낯설지 않게 듣습니다. 권위가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는 수많은 전문가가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소셜미디어에선 누구나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발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님의 조언, 선생님의 가르침, 심지어 목회자의 설교까지도 의심하고 검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불쾌하다고 느끼는 서비스 직원 유형으로 '귀찮은 말투'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단지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투 속에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불쾌감이죠.

 

이 '존중'의 문제는 결국 '권위에 대한 인식'과 연결됩니다. 권위는 신뢰와 책임에서 비롯되는 건강한 질서이지만, 권위주의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억압입니다. 문제는 이 둘을 혼동한 나머지, 우리는 건강한 권위마저 거부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삶을 지탱해 주던 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누가복음 20장의 포도원 비유는 이 질문에 대한 깊은 답을 줍니다.


2️⃣ 포도원을 착각한 사람들: 무너진 권위의 실상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받을 때가 되자 종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은 그들을 때리고 돌려보냅니다. 결국,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 농부들은 종교 지도자들, 종들은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왜 하나님의 사람들을, 결국 아들까지 죽이려 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맡겨진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유욕이 생기고, 결국 주인을 밀어내기까지 합니다. 이 착각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둘째, 주인이 보이지 않자 자신들이 주인이라 여겼습니다.

주인이 타국에 오래 있다 보니, 그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농부들은 자신들이 중심이라 여겼죠. 우리도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 쉽게 중심을 잃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내를 무능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시는 주인을 보며 농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봐, 우리가 이렇게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결국 그들은 주인을 무시하고, 머릿돌이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맡겨진 것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기도는 하지만 순종은 없으며, 예배는 드리지만 예수님은 중심이 아닌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3️⃣ 상속자를 죽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밀어낸 사람들

예수님의 비유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며 기대하십니다. "그들은 내 아들을 존대하리라." 그러나 농부들은 오히려 아들을 죽이고 유산을 차지하려 합니다.

 

이들이 아들을 죽인 이유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상속자'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이 되시면, 나는 내려와야 하니까요.

 

오늘날 우리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밀어낼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 되시기를 진심으로 원하기보다는, 조언자 정도로만 남아주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은 원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바로 종교의 껍데기이고, 머릿돌이 아닌 내 기준 위에 삶을 짓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비유의 끝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그리고 거절당한 돌이 머릿돌이 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4️⃣ 거절당한 돌, 머릿돌이 되다: 다시 세워지는 삶의 기준

예수님은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눅 20:17)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없고 실패자처럼 보였던 예수님.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머릿돌이란 건물의 방향을 정하고 무게를 지탱하며, 전체 구조를 결정짓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삶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분이 말씀의 기준이 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며, 사랑이 전체 구조를 붙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삶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거절당한 자도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실패했나요? 인생이 무너졌나요? 예수님은 무너진 자리 위에 다시 세우시는 머릿돌이십니다.


5️⃣ 결론 – 기본이 무너진 삶, 다시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신앙은 결국 삶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포도원 비유 속 농부들은 하나님 없이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고, 그 결과 기준 없는 종교와 주인 없는 삶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반복됩니다. 기도는 하지만 순종은 없고, 예배는 드리지만 예수님이 중심이 아닌 자리. 화려하게 보이는 삶을 짓느라, 기초가 무너진 줄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 나는 지금 무엇 위에 내 삶을 세우고 있나요?
  • 예수님은 내 삶의 중심 기준, 머릿돌이신가요?

삶의 기본이 무너졌다고 느껴지는 자리가 있다면, 그 무너진 자리 위에 예수님을 머릿돌로 다시 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 오늘, 한 가지 실천을 시작해 보세요

이번 주,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지금 내가 하려는 이 선택은 머릿돌 위에 있는가?"

매일 하루 한 번, 핸드폰 알람을 "감사의 타이머"로 설정해 보세요. 그 순간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머릿돌 삼아 감사 기도한 줄.

마음속 무너진 관계가 떠오른다면, 먼저 대화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그 한 걸음을 내딛어 보세요.

 

이것이 예수님을 진짜 머릿돌로 삼는 삶입니다.


🙏 마무리 기도

"주님,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삶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세우겠습니다. 그분 위에 가정을, 관계를, 일터를, 내 미래를 지어가겠습니다. 주님, 저의 머릿돌이 되어주십시오. 아멘."


머릿돌 위에 세워진 삶_눅 20장 9~19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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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버티던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8:35-19:10을 중심으로

 

버티는 것이 삶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그냥 버티고 있어요." "말하기도 지쳤어요." "특별한 일은 없는데, 그냥 힘들어요."

 

이런 말들이 요즘 우리 2030 세대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옵니다.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고, 집 한 채 마련하는 건 평생의 과제가 되었으며, 인간관계는 점점 더 피로감만 안겨줍니다. SNS에는 화려한 삶을 사는 또래들의 모습이 넘쳐나지만, 현실의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말이 삶의 철학이 되었고, '그냥 버티자'가 모토가 되었습니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인스타그램에 멋진 사진을 올리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만나 웃는 척하지만... 솔직히 물어봅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가끔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하지만 뭔가 공허함이 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 사랑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마저도 '버티는'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성경 속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저 버티기만 하던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바디매오 - 기대도, 빛도 사라진 자리에서 외침으로 인생을 바꾼 사람

누가복음 18장에는 여리고 성 근처 길가에 앉아 있던 한 맹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바디매오의 삶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는 '맹인 거지'였습니다. 이 두 단어는 그의 전체 정체성을 규정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 장애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내일을 계획할 수 없고, 꿈을 그릴 수 없으며, 그저 오늘 하루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전부인 삶이었습니다.

 

그는 늘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누구도 머물지 않는 곳입니다. 그는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누군가의 관심 안이 아닌 밖에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도 종종 이런 '길가'에 앉아 있다고 느끼지 않나요? 사회는 빠르게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저 구경꾼처럼 앉아있는 기분,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 바디매오의 상황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소문들... 그래서 바디매오는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를 꾸짖습니다. "조용히 해! 방해하지 마!" 하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크게 외쳤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 이런 경험 있지 않나요? 꿈을 이야기하면 "현실을 봐"라는 말을 듣고, 도전하려 하면 "너 같은 배경으로는 힘들어"라는 말을 듣는 경험... 우리도 종종 바디매오처럼 주변의 부정적인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멈춰 서신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은 외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셨고, 바디매오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더 이상 길가에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길을 걷는 사람, 방향과 목적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삭개오 - 모든 것을 가졌지만, 가장 공허했던 사람

누가복음 19장은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합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사람들로, 동족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졌습니다.

 

삭개오는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권력도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고위 공무원이나 대기업 임원 같은 위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경멸했습니다. 그는 민족의 배반자, 탐욕스러운 착취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깊은 소외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가 "키가 작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을 넘어 그의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작게'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돈과 권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모습이 있지 않나요? 학벌, 직장, 연봉, 외모... 이런 것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모습. 인스타그램에 멋진 사진을 올리며 '나는 괜찮아'라고 외치는 모습.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기 위해 나섰습니다. 키가 작아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고, 결국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런 체면보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나무 아래 서서 삭개오를 올려다보며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고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아셨고,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 즉시 기쁨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더 이상 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겠습니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자선 행위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가치를 돈과 권력으로 증명하려 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것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진짜 제자란 누구인가?

누가복음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바디매오와 삭개오 이야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말씀하신 장면입니다(눅 18:31-34).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분명히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았고,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마음과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분',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만 바라보지 않나요? 취업이 잘 되게 해주시고, 연애가 잘 되게 해주시고, 내 계획이 성취되게 해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않나요?

 

반면 바디매오와 삭개오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겉보기에 자격이 없었습니다. 무지했고, 소외당했고, 누군가가 보기에 부끄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오해했고, 예수님을 멀리서만 들었던 사람들이 진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진짜 제자란 누구인가? 단순히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은 나에게 그저 삶을 좀 더 편안하게 해주는 도우미는 아닌가요? 내 꿈, 내 계획, 내 성공을 이루는 도구로 여기고 있진 않나요?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건강, 성공...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진짜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섬김과 낮아짐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며,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디매오처럼 간절함을 잃지 않고, 삭개오처럼 내려올 줄 아는 사람—이들이 진짜 제자입니다.

 

회개의 자리 – 예수님 앞에 정직해지기

회개는 단지 죄를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리고, 삶의 중심을 바꾸고, 행동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전환입니다. 회개 없는 변화는 오래가지 않고, 결단 없는 믿음은 머릿속에서만 맴돕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시작은 단지 '예수님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눈, 즉 '영적 메타인지'가 회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달려야 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미루게 됩니다.

 

하지만 바디매오처럼, 삭개오처럼—그들은 모두 '자신의 상태를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인정했고, 삭개오는 감춰진 죄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솔직해졌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합니다. 괜찮은 척, 강한 척, 충분한 척. 특히 SNS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는 '보여주기'에 익숙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행복한 모습만 올리고,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멋진 문구만 적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은 어떤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외형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정직한 심령'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결핍, 탐욕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

 

시편 51:17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실천적인 회개의 단계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인 회개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1. 하루를 말씀과 기도로 여는 시간을 마련하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SNS를 확인하는 대신, 5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2. 공동체 안에서 진심을 나누기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지 마세요. 믿을 수 있는 교회 친구들과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나누세요.
  3. 내가 움켜쥐고 있는 무언가를 내려놓기
    우리는 종종 안전감을 주는 것들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보세요.
  4.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정직과 온유함을 선택하기
    직장에서, 학교에서, 관계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은 때로 손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5.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믿음을 마음속에서 다시 일으키기
    바디매오처럼 간절히 부르짖고, 삭개오처럼 열정적으로 찾아보세요.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회개를 '결단'으로 만들고, 믿음을 '삶'으로 바꾸는 실제적인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삭개오에게는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진심으로 나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며 외쳤고,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내려올 줄 알았습니다. 공통점은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미루는 선택이 아닙니다. "언젠가 예수님 잘 믿어야지." "언젠가는 삶을 바꿔야지." 그런 말들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세대입니다. 넷플릭스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볼 수 있고, 배달 앱으로 음식은 30분 안에 도착하며, 메시지는 즉시 전달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신앙만큼은 '나중에'로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억지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도 똑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삶에 머물고 싶다."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문을 열고, 예수님을 당신의 삶에 초대하십시오. 그분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문을 두드립니다. 취업의 문, 성공의 문, 인정받음의 문...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문은 우리 자신의 마음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만이 열 수 있고, 그 문을 통해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당신도 오늘, 예수님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작은 결단일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5분의 기도 시간을 갖겠다는 결단,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겠다는 결단, 오랫동안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결단... 하지만 그 작은 결단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시작할 때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시며,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디매오처럼 외치고, 삭개오처럼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십시오. 그 여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 '소망을 품은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5년 4월 6일 설교문

『하루하루 버티던 나_눅18,19장.pdf
0.0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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